1️⃣ 서른쯤에, 나는 반딧불이가 되었다
김광석의 ‘서른쯤에’를 서른 즈음에 들으면 감회가 새롭다는 인터뷰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느끼는 날이 오겠지 싶었지만, 막상 서른이 된 지금도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어야 비로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선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90년대와 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른이면 자녀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사회적으로도 자리를 잡은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10년 정도 뒤로 밀린 느낌이다. 그렇기에 지금 듣는 ‘서른쯤에’와 과거에 듣던 ‘서른쯤에’는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최근 감회가 새롭게 든 노래는 오히려 ‘서른쯤에’가 아니라 김광석의 AI 음성이 입혀 돌아다니는 ‘나는 반딧불’이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라는 가사가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유년 시절부터 20대까지의 나를 돌이켜보면, 나 역시 세상에서 가장 다재다능하고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마치 가사의 ‘별’처럼 말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세상에는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그리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면서도 그 차이를 느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20대의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애써 부정하며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군대, 사회생활을 경험하며 온 세상이 별천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0대 후반에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슬퍼했지만, 서른이 되면서는 오히려 시원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의 쓰임과 쓸모를 돌아보며 깨달았다. 나는 ‘별’이 아닐지라도 스스로 빛을 내는 ‘반딧불이’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다고. 반딧불이는 혼자서도 빛나지만, 여러 마리가 모이면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사회 속에서 나 역시 혼자가 아닌 다양한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의미 있는 빛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는다.
이제 나는 반딧불이를 넘어 별이 되는 그날까지 나만의 방식으로 빛을 내며 살아가려고 한다. 서른쯤에 느끼는 감정은 과거와 다를지라도, 그만큼 내가 성장해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시점에서 ‘서른쯤에’를 들었을 때, 지금과는 다른 감정이 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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